2017년 3월 4일 토요일

국사당, 선바위 역사문화트레킹

서대문독립공원에서 스물 다섯 번째 트레킹을 출발했다. 중종 31년(1536)에 명 사신을 맞기 위해서 모화관 남쪽에 영조문(迎詔門)을 세웠는데, 영조(迎詔)가 한군데 치우친 듯하다고 하여 3년 뒤에 영은문(迎恩門)으로 고쳤다고 한다. 영은문은 1895년 2월에 김홍집 내각에 의해 사대주의의 상징물이라 하여 현재의 장주형 초석만 남기고 철거되었는데, 그 자리에 건립된 것이 독립문이다. 독립문의 편액이 친일 매국노의 상징인 이완용의 글씨라는 것은 다소 뜻밖일 수 있는데, 새로운 수구파의 주장이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었음을 복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모화루는 태종 7년(1407)에 명나라 사신을 위한 영빈관으로 건립되어 세종 11년(1429)에 모화관(慕華館)으로 확장·개축되었다. 원래는 현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350m 떨어진 영천동에 있었다고 한다. 모화관을 대신하여 건립됐다는 독립관의 원기둥에는 흰색 페이트칠 대신에 흰색 천이 거의 절반 높이까지 둘러져 있다.


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가 설계한 붉은색 파놉티콘은 경성감옥(1908.10.21)으로 개소한 이래 서대문감옥(1912.9.3), 서대문형무소(1923.5.5)로 개칭되었다. 1936년 전국의 형무소는 17개소(소년형무소 3개 포함)이며 형무지소는 11개소에 달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형무소(1945.11.21), 서울교도소(1961.12.23), 서울구치소(1967.7.7), 서대문형무소역사관(1998.11.5)으로 변모하였다. 현재 사적 제324호(1988)로 지정되어 있다.


이강년, 허위, 이인영, 이은찬 등의 의병장과 이재명, 강우규, 채경옥, 송학선 의사 등이 이곳에 수감 후 순국하셨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진보당 사건(1958), 민족일보 사건(1961), 동백림 사건(1967), 인혁당재건위 사건(1975) 등의 피의자를 수감하여 사형시킨 반민주의 상징적인 곳이다.


12옥사 외벽에 내걸린 대형 태극기는 언제나 뭉클하다. 저급한 박사모야, 사이비 한기총아, 태극기란 이런 것이다. 태극기는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성계가 경복궁을 수호하는 호국도량으로 창건한 인왕사(仁旺寺)는 특이하게도 조계종 인왕사가 아니라 ‘인왕종 인왕사’로 되어 있다.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던 국사당은 1925년 일제가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지금의 인왕산 기슭 선바위 아래로 이전되었다. 명칭도 남산(목멱산) 시절에는 제사 사(祀) 자를 써서 國祀堂이었는데, 인왕산으로 오면서 스승 사(師) 자로 바뀌어 國師堂으로 되었다고 한다. 인왕산국사당과 국사당 안의 무신도는 각각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와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여 선(禪) 자를 쓴다는 7m 높이의 선바위는 그 기이한 생김과 특유의 기운으로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도성을 축조할 당시 무학대사의 인왕주산론을 누르고 정도전의 북악주산론이 채택되면서 선바위는 한양도성 안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되었다. 4호선 남태령 선바위역 인근에도 선바위가 있다.



높지 않은 산이라 해도 깔딱고개는 있기 마련… 오른편에 치마바위를 둘러두고 멀리 보현봉을 바라보면서 인왕산 정상에 도착… 애개, 338m 올라오면서 헥헥거리는 꼬락서니란… 좀 쉬엄쉬엄 달려야 할 때인데, 이눔의 사회가 자꾸만 술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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