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5월 21일 토요일

냉전의 호수 위를 걷다

오늘은 15번째 한반도평화올레에 참가하여 하루종일 화천 제3코스를 걸었다. 폐교 10년의 신명분교 자리에 터잡은 공연창작집단 ‘뛰다’에서 도보를 시작했는데… 문화 인프라가 열악한 강원 지역에 이러한 예술 창작공간의 존재는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새말교를 건너 풍산초등학교를 경유해 도착한 곳은 파로호 안보전시관이다. 바깥쪽에는 6·25전쟁을 전후하여 인민군에 의해 희생되거나 행방불명된 지역 반공민간인 3백여명의 영령들을 봉안한 위령탑이 서있다.
원래는 호수의 모양이 전설의 새 대붕을 닮았다 하여 대붕호(大鵬湖)로 불리웠다. 1951년 5월 20일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때 국군 제6사단과 해병 제1연대가 중공군 제10, 25, 27군을 화천저수지에 수장시키고 2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는 승전보를 전해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전선을 방문하여 장병들을 치하하면서 깨뜨릴 파(破), 오랑캐 로(虜)를 써서 파로호(破虜湖)로 불렀다는 데서 지금의 이름이 유래했다.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을 유커들이 안다면 글쎄… 관광객 유치에는 그닥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파로호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로호의 시원한 풍광이 후련함을 더해 주었다.
화천댐은 북한강 수계에 건설된 최초의 댐이며, 함께 건설된 화천수력발전소는 우리나라 유일의 댐 수로식 발전소로 일대의 지형을 활용한 것이다. 이 일대 하천은 깊은 골짜기를 따라 굽이쳐 흐르는 감입곡류하천이기 때문에 좁은 입구에 댐을 건설하면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고, 이 물을 다른 방향의 수로를 통해 낙차를 높이는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하고 있다. 화천수력발전소는 1940년대부터 전력을 공급한 국가 주요시설이라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현재 등록문화재 제109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이리 미륵바위는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절터로 추정된다. 화강석으로 제작된 5개의 미륵 중 가장 큰 미륵은 높이 170㎝, 둘레 130㎝로서 이보다 작은 미륵 1기와 보다 작은 미륵 3기가 나란히 북한강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거인이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거북이가 하늘을 향해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천읍 동촌리에 사는 장모라는 선비가 이 바위에 극진한 정성을 올린 후 과거에 급제하여 양구현감에 제수되었다는 전설과, 소금배를 운반하던 선주들이 안전한 귀향과 함께 장사가 잘 되기를 바라며 제를 올렸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김훈 작가가 작명했다는 ‘숲으로 다리’를 건너, 파로호를 감고 도는 4㎞가량의 나무데크로 조성된 산소길을 걸었다.


산소길의 명물인 푼툰다리(수상부교)는 이름 그대로 물 위를 걷는 듯한 이색체험을 안겨 주었다.

2016년 5월 20일 금요일

망원(望遠)

5월 14일(토)… 제15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망원동과 합정동 일대를 걸었다. 명례방협동조합의 2번째 야행(이야기가 있는 도보여행)을 겸한 일정이다. 6호선 망원역 1번 출구에서 출발하여 성산동 성당을 지나고, 홍익여중고를 경유하여 먼저 찾아간 곳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1990년 11월 16일, 37개 여성단체가 모여 창립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1992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아시아연대회의>를 발족한 이후 민족을 넘어 여성인권의 문제로 깊이와 넓이를 확장해 왔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원래 서대문구 독립공원 매점 부지에 건립될 예정이었으나 광복회 등이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지금의 성산동 자리에 들어서게 됐다. 못난 남자들 때문인데,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 취급을 하는 소위 독립유공자 단체라는 사람들의 자뻑의식에 어처구니가 없다.
19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당시 67세, 1997년 별세)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공개 증언한 것을 기념해 8월 14일을 ‘위안부 기림일’로 정했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수요집회는 1992년 1월 8일을 시작으로 2015년 10월 14일, 1200차에 이르고 있다.


기획전시관2를 관람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참전(1964.9~1973.3)한 한국군에 의해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이 발생하였고, 그에 따른 피해자들은 엄청난 정신적·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새삼 알게 됐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져야 하듯 한국 역시 베트남에서 자행한 부끄러운 일들에 대해 책임있는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역사의 산증인인 고령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제 42분만이 생존(2016년 5월 기준)해 계신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박유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따위 책(제국의 위안부)을 썼을까. 이덕일의 책 제목이기도 한 ‘우리 안의 식민사관’은 너무나 견고하다.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앞길을 거쳐 서교동 최규하가옥으로 향했다. tvN 응팔(응답하라 1988)에 동룡이네 집으로 나오면서 유명해진 곳이다. 드라마에서 동룡이가 이 식탁에 앉아 엄마가 끓여준 쇠고기미역국을 먹으며 눈물 흘리는 장면이 나왔었다.


12대 국무총리와 10대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는 1973년 오일쇼크 때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을 설득하여 원유를 확보하는 외교적 수완을 보여주기도 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피살된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킨 신군부에 단호히 대처하지 못하고 1980년 8월 16일 사임하고 만다. 문민정부 시절 신군부 일당이 내란죄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도 끝까지 법정 증언을 거부하고 관련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채 2006년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다.
지상 1·2층과 지하층으로 이뤄진 최규하가옥(등록문화재 제413호)에서는 최규하·홍기 부처의 검소함을 느껴볼 수 있다. 서울시 공공예약시스템에서 사전예약을 했기에 보다 상세한 해설(김영숙 전시해설사)을 들을 수 있었다.


태종의 차남이자 세종의 둘째형 효령대군이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세운 정자가 있었는데, 1425년 세종이 농사 형편을 살피러 왔다가 이 정자에 올랐을 때 때마침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가 내려 매우 기뻐하면서 희우정(喜雨亭)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가 20세에 요절한 관계로 세조 사후, 차남인 예종이 왕위를 이었으나 재위 14개월만에 의문사한다.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네살배기 어린아이였으므로 세조의 장손이자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군이 즉위해야 했으나,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들의 선택을 받은 차남 잘산군이 주상이 되니 이가 성종 임금이다. 월산대군은 희우정을 개축해 망원정(望遠亭)이라 이름하고 시문을 읊으면서 현실정치에서 손을 놓았다. 그후 어머니인 덕종비 소혜왕후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35세로 병사했다.
연산군 시절 망원정의 규모가 연회를 즐기기에 협착하다 하여 증축을 명하면서 수려정(秀麗亭)이라 고쳐 부르기도 했으나, 중종반정 이후 다시 아담한 정자로 남게 되었다.


강변도로 쪽의 솟을삼문이 아름다운 망우정…
가을밤에 낚시를 드리웠는데 고기 대신 빈 배에 달빛만 싣고 돌아오는 자연인의 유유자적하는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가 선명한 ‘추강에 밤이 드니’란 월산대군의 시조를 읊조려 본다. 멀리 원거리까지 조망할 수 있다는 망원(望遠)의 의미가 새삼 새롭게 다가온다.


당산철교 지척에 20m 높이로 우뚝하니 자리잡은 사적 제399호 잠두봉(蠶頭峰)은 수도 한양의 방어기지였는데…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수당한 후에는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충남 아산 음봉에서 옮겨온 복자바위(福者岩)는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신도들이 형장으로 끌려갈 때 걸터앉아 성가를 불렀던 바위인데,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바위’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두 번에 걸친 양요를 격퇴한 흥선대원군은 1871년(고종 8) 4월, 종로 네거리를 위시한 전국의 교통 요충지 200여 개소에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으로 유명한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높이 4자 5치, 너비 1자 5치, 두께 8치 5푼의 화강석으로 제작했다는데… 순교성지 내의 척화비는 나중에 세운 가비(假碑)가 아닌가 생각된다.


양화진 장대석을 통해 어영청 관할의 진대(鎭臺)를 설치하여 옛 양화도(楊花渡)를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호조에서는 삼남에서 올라온 세곡을 관리하기 위해 점검청을 두었다고 한다.


1904년 3월 4일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지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입국한 어니스트 베델(Ernest Bethell, 1872~1909)은 4월 14일 (Daily Chronicle) ‘일제의 방화로 불타버린 경운궁의 화재’라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로 해임된 후, 양기탁·박은식·신채호 선생 등과 함께 1904년 7월 18일 민족지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창간했다. 고종은 선생에게 ‘배설(裵說)’이라는 한국이름과 함께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영국인인 베델 선생이었기에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으며 국한문·한글·영문판 등 3종을 합해 발행부수가 1만부에 달하는, 당시 최대의 신문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사설을 실었으며, 일제의 압력을 받은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에 의해 재판에 회부되고, 1909년 5월 1일 고문후유증으로 서거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후 대한매일신보는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인수되어 제호에서 ‘대한’이 빠진 매일신보로 개칭, 1910년 8월 30일자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했다.
베델은 37세로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생애의 마지막 5년을 한국에서 보냈고, 유해는 고국 영국이 아닌, 이국땅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되었다(A-2). 선생은 “나는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를 영생케 하여 조선의 백성을 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받았다.


베델 선생 묘소 옆에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분’으로 불리는 감리교 선교사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 박사의 묘소가 있다. 박사는 육영공원의 영어교사로 근무하면서, 이후 한국의 독립운동을 다방면으로 지원하였다.
고종의 헤이그 특사증은 헐버트, 이회영, 이상설 순으로 전달되었다. 이로 인해 일제에 의해 추방된 지 42년 만인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정부의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내한한 헐버트 박사는 입국 일주일만인 8월 5일 86세를 일기로 한국 땅에서 서거하였다. 평소 “나는 웨스터민스터 성당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소망에 따라 박사의 유해는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안장됐다(B-7). 1950년 3월 1일에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제국주의의 압제에 신음하던 낯선 이국의 땅에서 이국인들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이국땅에 묻힌 벽안의 선열 두 분의 영면을 기도한다. 건국절을 주장하는 정치인부터 꺼리낌 없이 “덴노헤이카 반자이”를 표방하는 경제계, 언론계, 문화계, 교육계, 종교계까지… 아직도 친일부역세력이 횡행하는 우리의 현실… 참으로 부끄럽다.

2016년 5월 18일 수요일

합창 vs 제창

임을 위한 행진곡… Dm과 Gm 코드가 어우러진 비장한 어조의 진혼곡. 1982년 5월, 시민사회운동가 백기완의 옥중시 ‘묏비나리’(1980)의 일부를 차용하여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붙이고, 전남대학생 김종률이 곡을 지었다. 김종률·정권수·박미희 트리오는 ‘영랑과 강진’으로 1979년 제3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1980년 5·18 당시 광주에서 희생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노동현장에서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1979년 과로로 숨진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음악극 ‘넋풀이 굿’(빛의 결혼식)에 포함되어 있다. 온 몸을 바쳐 치열하게 투쟁했지만, 종국엔 비극적 결말로 고인이 된 두 남녀가 앞서 저승으로 가면서 산자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노래로 배치되어 있다.

1997년부터 2008년까지 10년 넘게 제창되던 노래인데, 수구(守舊)들은 1991년 북한이 5·18을 소재로 제작한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점 등을 들어 기념곡 제창을 반대해왔다. 하지만 노래가 만들어진 시점은 1980년대이고 북한에서 사용한 시점은 1990년대라는 선후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맹목적인 단견·편견에 불과하다. 여기엔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된 5·18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 피해자와 유족들이 부르겠다는데 가해자측 사람들이 거부하는 형국이다. 이래선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이루어질 수 없다.

뭐~ 덕분에 제창과 합창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게 됐다. 요컨대 합창(合唱)은 합창단이 부르는 것이고, 제창(齊唱)은 참석한 모든 사람이 부르는 것이다. 합창단이 노래할 때는 참석자들이 따라 불러도 되고 부르지 않아도 무방하지만, 제창 시에는 모든 사람이 함께 불러야 의미가 더해지기 때문에 두 방식은 유의미한 차이가 나게 된다.
2009년 이명박 때부터 합창으로 변경됐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대화가 통하는 어디 제대로 된 진정한 보수 없나?

2016년 5월 17일 화요일

오일륙

오늘은 5·16군사정변이 일어난지 55년이 되는 날이다.
‘국가에 대한 일격’이라는 뜻의 쿠데타(coup d'État)는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것을 말한다. 한국브리태니커(온라인)에 따르면… 혁명이 피지배계급에 의한 반란인 데 비해 쿠데타는 일부 지배권력이 자기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수행되며, 권력이동은 지배계급 내부의 수평이동에 불과하다.
쿠데타는 군대, 경찰, 그밖의 무장집단 등에 의해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며 정권탈취 후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언론 통제, 반대파 숙청, 의회의 정지, 헌법 개폐(改廢) 등의 조치를 취한다. 일반적으로 쿠데타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는 것은 국가적인 규모의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위기, 기성 정치권의 무능, 의회의 정상적인 기능 마비 등이며, 또 이에 대해 국내에 유일한 무력조직으로서의 군대나 경찰 및 이를 지휘하는 야심적인 정치가나 장군 등의 존재이다. 쿠데타의 전형으로는 1799년 11월 9일(공화력 8년 브뤼메르[霧月] 18일) 통령정치를 타도하고 스스로 제1집정이 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1851년 12월 2일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제정(帝政)에의 길을 연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있다.


“임시정부는 민족운동단체이지, 정부가 아니라”는 김용직이 관장으로 있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는 5·16군사정변에 대해 사진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오정윤 미래학교장이 저술한 「교과서와 함께 읽는 청소년 한국사 2」(도서출판 창해, 2010년, 2만2천원)의 관련 부분을 옮겨 적는다.

1960년 8월 3일에 출범한 민주당정부는 분출하는 사회적 욕구를 맞추지 못해 초기에는 국내질서를 잡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 유로코뮤니즘(유럽사회주의), 제3세계운동, 반전(反戰)과 민족주의 열풍이 국내로 들어와 학생들의 자주의식과 통일운동을 자극하였다.

보수적이고 친일적인 군부세력은 민주당 정부의 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군부세력은 한국전쟁(6.25)을 치루면서 반공으로 무장한 강력한 조직체로 성장하였고, 미국의 군사행정을 도입하여 가장 선진적이고 체계적인 엘리트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이들 군부세력은 국내의 혼란과 학생들의 거침없는 통일운동을 빌미로 정치적 야욕을 실현할 명분으로 삼았다. 시민의 피로 이룩한 민주주의는 이제 군부세력의 군사반란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5.16 군사반란, 박정희 군사독재

4.19혁명의 성공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민권의식이 고양되었다. 당시에 혁명으로 부상당한 학생들이 의사당에 진입하여 자유당 정권에 협력하여 반민주 행위를 한 인사들에 대해 처벌할 수 있는 반민주행위자처벌법의 제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국회는 11월 29일에 소급입법의 근거를 마련하는 부칙 개헌을 하여 반민주행위자들의 형사사건을 다루는 특별재판소, 특별검찰부를 두게 되었다. 이를 4차 개정헌법이라고 한다.

장면정부가 경제계획과 민주적 정치운영으로 정국운영을 가닥잡아 가고 있을 때 정치권력에 뜻을 가진 군부세력은 민주열기의 혼란을 민주당의 무능이라 주장하며 1961년 5월 16일에 만주군 출신의 친일군인 박정희를 중심으로 군사반란(쿠데타)을 일으켰다.

박정희 육군소장과 육사 8기생, 청년장교를 포함한 3천 6백명이 주도하여 일으킨 5.16 군사반란은 국민들의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수립된 민주정부를 전복한 반국가 반란사건이었다. 군부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세우고 6대 혁명공약(반공이념, 친미외교, 부패청산, 경제재건, 반공통일, 민정이양)을 발표하였다. 미국정부와 보수적인 국민들은 사회개혁과 반공을 내세운 군부세력을 지지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장면내각을 접수하고 권력기구의 명칭을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바꾸었다. 군사정부는 사법, 입법, 행정을 장악하고, 혁명검찰부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농단하였으며, 민주인사의 감시, 노동운동과 통일운동의 탄압, 진보적인 언론의 통제를 위해 한국중앙정보부(중정)를 세워 공안정치를 시작하였다. 1961년 7월 3일에는 반공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반공법을 제정하였다.

혁명공약에서 민정이양을 약속한 군부세력은 1962년 11월에 헌법개정안을 마련하여 12월 17일 국민투표에 부쳐서 통과시켰다. 5차 개정헌법의  주요한 내용은 1)대통령 직선제, 2)국민투표를 통한 헌법개정, 3)단원제(지역구, 전국구)를 특징으로 하였다. 군부세력은 민정이양의 시기가 무르익자 비밀리에 수권 정당의 설립을 준비하고 이듬해인 1963년 2월 26일에 드디어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다.

개정헌법에 의해 1963년 10월 15일에 국민직선제로 치루어진 5대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 후보는 46.6%를 얻어 45.1%를 얻은 민정당 윤보선 후보를 15만 6천여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여세를 몰아 11월 26일에는 총정원 175명(지역구 131, 전국구 44)을 소선거구제로 뽑는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통령을 배출한 공화당은 62.8%인 110명(88/22)을 차지하여 다수당이 되었고, 야당은 분열하여 민정당이 41명(27/14), 민주당이 13명(8/5), 국민의 당이 지역구 2명을 당선시켰다. 박정희 대통령은 헌법상의 절차적 합법성을 획득하고 12월 17일에 제3공화국을 출범시켰다.

2016년 5월 15일 일요일

어머니의 마음, 스승의 은혜

어릴 적, 해마다 5월이면 자주 불렀던 두 곡… 양주동 작사, 이흥렬 작곡의 「어머니의 마음」과 강소천 작사, 권길상 작곡의 「스승의 은혜」는 서로 다른 노래지만, 4분의 3박자 바장조여서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진 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다음에  “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이어나오곤 했다.


가이 없는 어머님도, 우러러 볼 스승도 이제는 계시지 않는다.
반중(盤中) 조홍(早紅)감이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2016년 5월 13일 금요일

평창마을길 트레킹

5월 7일(토) 오전… 제14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북한산둘레길 6구간 평창마을길을 걸었다.
01-150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바로 한국고전번역원(韓國古典飜譯院)이다. 예전에는 민족문화추진회(民族文化推進會)라고 했던 것 같은데… 하여간 이곳에서 출발하여 구기동 교동짬뽕 옆 언덕길로 올라갔다.


목조여래좌상(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341호)으로 알려진 보각사(寶覺寺) 내리막 담장에 분홍 연등이 빼곡히 내걸렸다. 개인사찰인 청련사(靑蓮寺)를 지나면 동국대 종비생(宗費生) 비구니 수행관인 혜광사(慧光寺)가 나온다. 걷는 내내 기가 세기로 유명한 보현봉(普賢峰)을 마주하게 된다.


평창동 보현산신각(서울시 민속자료 제3호)은 북한산 보현봉(普賢峰) 산신(山神)을 모신 곳으로, 소박한 규모와 구조의 단칸짜리 맞배집이다. 안에는 호랑이와 함께 있는 산신을 묘사한 전형적인 산신도를 모셨다. 보현산신각 서쪽 약간 떨어진 곳에는 산신의 부인을 모신 여산신각이 있는데, 그곳에 1923년에 제작한 산신도를 모셨다. 이곳은 신당이 아니라 산신각(山神閣)이기 때문에 부부간을 위한 도당굿 같은 굿판을 벌이지 않으며, 소란을 피울 수 없다. 매년 3월 1일과 9월 13일 두 차례에 걸쳐 유교식 제례를 올린다. 제물은 다른 제당과 유사하지만,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삶아 바치는 것이 특징이다. 마을이 평안하고 주민이 안녕하기를 산신께 기원하던 민간신앙의 면모를 잘 간직하고 있다.


‘The Piano was drinking, Not Me. / 변명’이란 제목이 붙은 건물이다. 컬컬한 음색을 가진 톰 웨이츠의 ‘The Piano Has Been Drinking’에서 따온 작명인지도 모르겠다.
표지석에 2010 아시아실내디자인학회 금상, 2010 아시아태평양 스페이스디자이너협회 우수상, 2009 한국실내건축가협회 수상이라는 설명이 있다.


계곡을 지나고 평창동 언덕에 자리한 연화정사(蓮華精舍)를 지나 명상길(북한산둘레길 5구간) 방향으로 선선히 걸어나갔다.


소나무는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는 자웅동주(암수한그루)이다. 위쪽의 붉은 꽃이 암술이고 그 밑쪽의 길쭉한 부분이 수술이다. 잎이 두 가닥인 것을 보니 우리나라 소나무(한솔)가 맞다. 일본산 리기다소나무는 침엽이 3개이고, 잣나무는 5개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송화가루가 날렸다.


일본이 원산지로 알려진 영산홍(映山紅), 자산홍(紫山紅), 백철쭉이 들어서 꽃내음 가득한 조용한 길에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이국적 풍경의 카페같은 집들이 늘어서 있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면서 설립한 선혜청(宣惠廳)의 평창(平倉)이 있던 데서 평창동(平倉洞) 동명이 비롯되었다. 창동(倉洞)의 유래도 비슷한 경우가 되겠다. 선혜청은 지방에서 올라오는 대동미의 출납을 위해 용산강에 별창(別倉), 삼청동에 북창(北倉), 옛 장용영(壯勇營) 자리에 동창(東倉), 남대문 안에 남창(南倉)을 두었다.

2016년 5월 12일 목요일

원천부원군 묘소 참배

5월 5일…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 장군을 찾아뵈었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대은선생 행장(行狀)’ 역문(譯文)이다.

공의 휘(諱)는 안열(安烈)이요, 자는 충가(忠可)요, 호는 대은(大隱)이요, 성은 변(邊)씨라. 변씨는 본래 자성(子姓)이니 은(殷)나라 미중(微仲)의 후손이라. 미중이 송왕(宋王)에 봉(封)하여 그후 평공(平公)에 이르러 아들 어융(禦戎)이 자가 자변(子邊)이니 자손이 이로 인하여 성으로 하다.
 대대로 중국 롱서(隴西)에 살았다가 변송말(汴宋末)에 바다를 건너 동으로 와서 취성(取城)에 거하니 곧 지금의 황주(黃州)라. 우리 고종(高宗) 때에 휘(諱) 여(呂)가 있어 충절로서 상장군에 재수되어 태천백(泰川伯)을 봉하였다. 그 후 휘(諱) 윤(允)은 진사로서 서해도안찰사가 되었다. 생휘(生諱) 유(宥)인데 공부의랑(工部議郞)이요. 생휘(生諱) 제(制)는 검교참지정사(檢校參知政事)이고, 행위(行諱) 눌(訥)은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요. 부인은 백(白)씨니 공에게 증조라.
생휘(生諱) 석(碩)은 문과통례(文科通禮)니 문장으로 명성이 높았고 그의 아우 순(順)은 원나라의 벼슬하여 심양후(瀋陽候)를 봉하였고 고려조에서 삼중대광문하찬성사(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추증하였고 부인은 오(吳)씨니 공의 조(祖)라. 생휘 양(諒)은 세습하여 심양후를 봉하고 성근익조공신(誠勤翊祚功臣) 벽상삼한삼중대광문하찬성사(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贊成事)를 겸직하였고 부인은 곽(廓)씨 공의 부모라. 원통(元統) 2년 갑술 4월 갑자일에 심양사제(瀋陽私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지조가 청고(淸高)하고 국량(局量)이 넓어서 문장도 능하며 무예도 뛰어나서 세상을 경륜하는 재능이 있었다. 지정(至正) 11년 신묘 정월에 18세로 무과에 장원급제한 것은 특히 재예(才藝)가 남보다 뛰어남이라. 일 년 동안에 초승(超陞)하여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 12월 경자(庚子)에 우리 왕대비가 원나라 노국공주로서 공민왕에게 하가(下嫁)하니 그때 공이 수장(首將)으로서 배행(陪行)하고 와서 드디어 우리 조정에 벼슬하였다.
 임진에 왕의 친척인 판추밀(判樞密) 원의(元顗)의 딸과 결혼시키고 원주로 관적(貫籍)을 하사하였으니 원씨의 본관이 원주이므로 관향을 원주로 하였다. 임인(壬寅)에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파하여 이등공신을 녹훈(錄勳) 받고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에 배명되었다. 조공 후 경성을 회복하니 일등공신에 녹훈하고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제수하였으며 추성보조공신(推誠補祚功臣) 호를 하사받았다.
 얼마 후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되고 두 번 겸직하여 지삼사일직사사(至三司密直司事)가 되었다. 계축(癸丑) 8월에 총의용우군(總義勇右軍)이 되고, 갑인 9월에 최영과 같이 제주의 적을 토벌할 것을 정하여 판밀직사사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배명되었다가 평리로 전직이 되었다. 을묘에 상왕이 즉위하자 공이 원수가 되어 심왕(瀋王)을 격파한 공으로 윤충량절선위익찬공신(輪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하사받았다.
 병진 9월에 양광(楊廣) 전라도도지휘부사 겸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11월에 왜적이 부령(扶寧) 행안산(幸安山)에 올라가는지라 공이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유실(柳實) 등과 다같이 독전하여 적을 대파하니 참획(斬獲)한 바가 심히 많았고 첩보를 상진(上秦)하니 왕이 백금 한 덩이와 안마(鞍馬)와 의복을 하사하였다. 개선하여 돌아오자 2품 이상의 고관들이 천수문(天壽門)에 나와 굿놀이를 하며 맞이하였다. 공이 승진하여 문하찬성사가 되었다.
 정사(丁巳) 3월에 경기도 총사로 재수되어 왜구를 공격할 새 4월에 왜선이 서강으로 침입하거늘 공이 최영과 더불어 격파 퇴각시켰다. 5월에 왜적을 수원 양성(陽城)에서 격파하고 8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서 조전원수가 되어 왜적을 해주에서 격파하였다. 또 최영과 같이 왜적을 해평에서 격파하다. 경신(庚申) 8월에 왜선이 대거 침공하여 충청·전라·강원·경상도를 도살하고 인민을 살상하니 지나는 곳마다 피바다가 되어 왜적이 침략한 피해가 가장 심하였다. 왕이 이성계를 명하여 양광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공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왜적을 운봉 인월역에서 대파하니 시냇물이 붉은 빛이 되어 6,7일이 되어도 빛이 변하지 아니하였다. 이 싸움에서 말 1,600여 필과 무기를 무수히 노획(鹵獲)하여 첩보가 상진되자 왕이 크게 기뻐하여 궁중에 큰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였다. 10월에 개선하니 왕이 최영에게 명하여 백관을 거느리고 채색한 누각을 설치하고 천수문 앞에서 영접하고 이성계와 공에게 황금 50냥을 각각 하사하였다.
 임술 4월에 왜구가 담양을 침략하자 공이 도원수가 되어 한방언(韓邦彦)과 더불어 격파하고 8천여급을 참수하고 말 200여 필을 노획하였다. 5월에 또 한방언 등과 같이 왜구를 안동에서 격파하여 3천여 급을 참수하고 말 60필을 노확함에 훈록으로 원주부원군(原州府院君) 봉하였으며 얼마 후 판삼사사가 되었다.
 무진(戊辰)에 이성계를 따라 요양 정벌에 가서 위화도에 이르러 의리(義理)를 들어 회군하였다. 6월에 상왕이 강화도로 추방되자 공이 드디어 통곡하고 두문불출하였다. 내가(牧隱) 공과 더불어 정비(定妃)의 교지(敎旨)를 받고 왕자 창(昌)을 옹립하였다. 9월에 상왕이 여흥(驪興)으로 옮기자 공이 사사로이 알현(謁見)하고 나와 더불어 상왕을 영립(迎立)할 것을 꾀하였다. 이로부터 왕실에서 믿음이 있고 조정의 명망이 심히 높았다.

 이성계가 포은과 공을 초청하고 주석(酒席)을 베풀고 술을 권하여 노래하기를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성황당 뒷 담이 퇴락(頹落)한들 어떠하리
우리들이 이러하다 죽지 아니하면 또한 어떠하리’ 하니

 포은이 화답하여 노래하기를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하고

 공이 또 화답하기를
‘내 가슴 구멍 뚫어 동아줄 길게 꿰어
앞뒤로 끌고 당겨 갈겨져 쓰라림은 네맘에
맡기련만 우리 님 빼앗는덴 내 어찌 굴할소냐’ 하였다.

 기사(己巳) 11월에 대호군 김저(金佇)가 밤에 이성계의 집에 들어가서 이성계를 모해(謀害)코자 하다가 도리어 잡혀 갇힌 바가 되어 국문(鞠問)에 불복하니 이에 칼로서 발바닥을 베고 불로 지져대자 묻는데 따라 자복하였다. 이것이 구실이 되어 공이 연루되니 드디어 옥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상왕(上王)을 강릉으로 옮기고 왕자를 강화로 추방하였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서 영삼사사(領三司事)에 승진(陞進)되었다. 경오(庚午)정월에 낭사(郞舍) 윤소종(尹紹宗)·이언(李彦)·오사충(吳思忠) 등이 상소하고 공에게 사형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고 다만 파직만 하였다. 다음 날 또 상소하니 왕이 오히려 관대히 하여 삭직(削職)하고 한양으로 유배하였다. 또 그 무렵 성문 밖에서 강도가 일어나고 궁정에 여우가 나오는 것을 변안열의 소의라고 면전에서 진달(秦達)하고 또 5차나 상소하였다.
 대사헌 성석린(成石磷)이 공을 대역으로 논계(論啓) 하는지라 왕이 부득이하여 상소를 물리고 배소(配所)로 보내어 ‘국문(鞫問)을 하지 않고 사형하라.’하니 평의사가 상진하기를 ‘대신을 그 죄로 묻지도 아니하고 극형에 처함은 불가하다.’하니 왕이 좌사의(左司議) 오사충과 집의(執義) 남재(南在)에게 가서 힐문케 하니 벽재역에 이르르니 공이 이미 피화(被禍)됨을 들었다. 실은 정월 16일 경진에 피화되었다.
 이에 4월에 회군의 공을 훈록할세 교서(敎書)에 말하기를 ‘변안열은 이미 죽었으나 의를 일으켜 회군하였으니 그 공을 가히 잊을 수 없다.’ 하고 녹번을 하사하고 직첩(職牒)을 환급하였으며 묘지를 하사하여 양주(楊州) 주엽(注葉)에 의관(衣冠)으로 장사(葬事)하였다.
 신미(辛未) 9월에 공이 이초(彝初)의 무고(誣告)에 사연(辭連)되어 마침내 훈작(勳爵)을 삭탈(削奪)하고 가산을 적물(籍沒)하였다.
 아! 공의 충열(忠烈)이 포은(圃隱)과 같으니 후인이 논하고자 하는 자는 포은에 구하면 가(可)할 것이다. 공의 배위(配位)는 진안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 원(元)씨로 3남 1녀를 낳으니 남(男)은 현(顯))이니 문과급제를 하였으며 이(頤)와 예(預)요 여(女)는 이방번(李芳蕃)에 출가하였고 손(孫)에 남녀는 70여 인이다.

2016년 5월 9일 월요일

공빈 김씨 모자 묘역

12차 역사문화트레킹으로 공빈 김씨 삼모자(三母子) 묘역을 답사했다.
조선 15대 임금 광해군 이혼(李琿)은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으로,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의 소생이 없던 차에 임진왜란의 발발로 세자에 책봉되었다. 전란 중 임시정부 성격의 분조(分朝)를 이끌며 관민의 신망을 얻었는데, 이는 정탁(鄭琢)이 기록한 피난행록(避亂行錄)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방계승통의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선조는 말년에 계비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적자 영창대군을 후계로 삼고 싶어했으나, 두 살배기 어린 아이였기에 승하 직전 할 수 없이 광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1608년 즉위 초부터 광해군은 전후복구에 전념하였고,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또한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의 자구책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친형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유배 후 사사하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는 실정으로 반정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결국 능양군 이종(李倧)과 반정군에게 폐위당한 후 강화를 거쳐 제주도에 유배되어 67세(1641년)의 천수를 다했다.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1643년 제주도에서 현 위치로 옮겨졌다.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에 위치한 광해군묘(사적 제363호)는 2개의 봉분(쌍분)에 각각 비석과 상석이 있고, 장명등 하나에 망주석 2개, 문인석 1쌍이 세워져 있다.
문화류씨 문성군부인의 저고리가 중요민속문화재 제215호(광해군비당의)로 지정돼 있다.


이어서 2번째 답사지는 선조의 후궁이자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 사적 제365호).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1553~1577).
즉위 직후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1610년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능호를 성릉(成陵)이라 했다. 광해군 폐위 후 시호와 능호가 모두 삭탈되어 성묘(成墓)로 강등되었으나, 추숭 당시에 만들었던 석물들은 그대로 보존되었기 때문에 여느 왕릉과 같은 외양을 볼 수 있다. 2006년에 성묘에 대한 도굴 시도가 있었으나 미수에 그친 것으로 파악됐다.


전광렬이 주연한 MBC 드라마 <허준>에서 박주미가 공빈으로 출연했었다.
진건읍의 송릉리라는 지명은 소나무가 많고 성릉이 있는 마을이라는 송릉(松陵)에서 유래되었다.


임해군 이진(李珒, 1572~1609)은 선조의 서장자이자 광해군의 친형으로 공빈 김씨 소생이다. 임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러 함경도에 갔다가 가토 기요마사(加藤清正)의 포로가 되어 협상 끝에 풀려났다.


방탕하고 난폭한 성격 탓에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광해군 즉위년에는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에 따라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 이후 이이첨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6년 5월 8일 일요일

비운의 황실 묘역

2015년 한포(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 포럼) 4월 답사지는 남양주 금곡 땅…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의친왕묘(義親王墓).
의친왕 이강(1877∼1955)은 귀인 장씨의 소생으로 고종의 5남이다. 1877년(고종14)에 태어나 1891년(고종28)에 의화군(義化君)에 봉해졌다. 1899년(광무3) 미국에 유학했고, 이듬해인 1900년(광무4)에 의친왕(義親王)으로 진봉되었다. 1906년 귀국 후 대한제국 육군 부장, 대한적십자사 4대 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등 국권회복에 힘썼다. 1919년 11월 대동단 단원들과 함께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망명을 시도하였으나 단동역(丹東驛)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으로 송환되었고, 1930년에는 작위까지 박탈당했으나, 1940년 일제의 창씨개명령도 거부하였다. 광복 후 평민 신분으로 살았으며, 6·25전쟁 때에는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였다. 1955년에 안국동 사동궁에서 79세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양주 화양리(현 성동구 화양동)를 거쳐 서삼릉 권역으로 묘소가 옮겨졌다.
1964년 궁정동 칠궁에서 85세로 작고한 의친왕비 김수덕의 묘가 홍유릉 권역 밖(현 외재실 근처)에 조성되었는데, 1996년에 서삼릉 권역의 의친왕묘와 홍유릉 권역 밖의 의친왕비묘를 이장하여 덕혜옹주묘 동쪽 땅에 합장하였다.


봉분 앞쪽에 상석·향로석이 있고, 오르내리는 다람쥐(세호)가 부조된 망주석 사이에 장명등이 세워져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석 조차 없는 허술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황족 중 가장 항일정신이 투철하였던 의친왕의 생애를 돌아다 볼 때, 전주이씨종약원 측에 보다 꼼꼼하고 실질적인 일처리를 요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