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30일 화요일

광희문 탐방

광희문(光熙門)은 1396년(태조5) 도성이 완성될 당시 동남문으로 건립되었다. 두모포 등 서울의 동남 방향 한강변의 포구로 나가는 문이어서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서소문인 소의문과 함께 국왕이 아닌 일반 장례행렬이 나가는 문이기는 하였으나, 늘 시신(屍身)이 쌓여 있어 시구문(屍軀門)이라고 하였다는 설명은 마땅하지 않다.
광희문은 1711년에 개축하였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이라는 편액은 이 때 써 붙였다.
광희문은 일제초기에 들어와 문루는 없어지고 홍예문이 뚫린 석축만 남게 되었다. 1966년에 문 북쪽의 성곽을 헐고 도로를 확장하면서 문으로서 기능을 잃었다. 1975년에는 도성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광희문을 남쪽으로 한 15m 옮겨 복원하면서 없어진 문루를 다시 지음으로써 오늘날과 같이 을지로와 퇴계로가 끝나고, 그 두 길이 합쳐서 왕십리길이 시작되는 지점의 길 한편에 남게 되었다.





2014년 9월 28일 일요일

흥인지문 탐방

동대문의 본 이름은 흥인문(興仁門)이다. 현재 편액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되어 있다. 산줄기 모양의 갈 ‘지(之)’자를 하나 더 넣어 지세를 보완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흥인문은 타락산이 끝나는 지점, 청계천과 가까운 지점에 있다. 그 부근의 지반이 약하여 조선 태조대 이후 여러 차례 보강 수리 공사를 하였다.


흥인문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문밖을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의 겹성벽인 옹성(甕城)이 있다. 옹성은 겹지붕의 문루와 함께 흥인문의 특징이 되고 있다.
흥인문은 동쪽으로 나가는 대로의 출발점이며 성안으로는 운종가(雲從街)가 이어져 도성 가로망의 동서 중심축을 이룬다. 1899년 전차 개통시 전차 선로가 문을 통과하게 되었으며, 흥인문 안 바로 남쪽에 전기 발전소와 전차 차고가 있어 서양 문물의 영향도 크게 받았다. 오늘날에는 인근에 시장이 발달하여 흥리(興利)의 현장이 되었다. 좌우 성벽이 모두 잘려나간채 도로 한가운데 남아 있지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흥인문은 보물 1호의 값을 다하고 있다.


옹성은 흥인지문 외부를 반달모양으로 감싸고 있으며, 북쪽 한쪽만 개방하여 출입하도록 하고, 나머지 3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대문의 옹성은 1397년(태조6) 1월에 착공하여 4월에 완성하였다. 태조가 동대문에 한하여 옹성을 쌓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대문 부근의 지형이 낮을 뿐만 아니라 동대문 북쪽의 낙산도 낮고 평탄하여 적을 방어하기에는 부적당한 곳이므로 옹성을 쌓아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전소설 「박씨전」에서도 북방 호적이 의주 부윤 임경업이 지키고 있는 의주는 감히 범하지 못하고 백두산을 넘어 동으로 쫓아 동대문을 깨치고 들어와 한양을 습격할 것이라는 충렬부인 박씨의 예언이 언급된다.

2014년 9월 27일 토요일

영원히 전달되지 못한 비단 편지… 황사영 백서

1785년 천주교의 신앙활동이 조정에 보고되어 김범우(토마스) 등은 유배되었고 많은 서적이 불살라졌으나 정조는 비교적 천주교 탄압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성리학을 한층 교조적으로 신봉한 노론계열 집권자들은 천주교가 충효사상에 반하고 군신의 도를 해치며 사회의 기강을 문란케 한다 하여 1791년(정조15)의 신해사옥(신해박해·진산사건), 1801년(순조1) 신유사옥(신유박해)을 일으켰다.

신유사옥은 천주교 전래 후 최대의 박해로서 이때 이승훈·이가환·권철신·정약종과 중국인 신부 주문모 등 3백여명이 순교하였고, 이후 천주교인 색출을 위하여 5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시행되었다.

신유년의 천주교 대박해를 피하여 충청도 점말(배론,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숨어 들어온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는 신도들과 함께 옹기를 구워가며 연명하면서, 신유박해의 전말과 그 대응책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편지(帛書)를 완성한 지 7일째 되던 날, 먼저 체포된 황심의 발고로 1801년 11월 5일에 체포·압송되어 의금부에서 추국을 받은 뒤 12월 10일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백서(帛書)란 당시 비밀정보를 명주천에 글로 쓰고 옷 속에 꿰매 넣어서 보내는 편지의 일종으로, 여기에 백반을 칠하면 글씨가 보이지 않으며 물에 담그면 글씨가 되살아난다고 한다.


가로 62㎝, 세로 38㎝의 하얀 비단에 가는 붓으로 행당 110여자씩 122행을 깨알같이 써서 전체 글자 수가 무려 1만3311자에 달하는 ‘황사영 백서’(黃嗣永 帛書)에는 박해받는 천주교를 지키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방안에 대한 평신도의 고민이 담겨 있다. 조정에서는 이 백서를 860여 자로 고쳐서 청 황제에게 보고하였다.

북경 주교에게 영원히 전달될 수 없었던 백서에는 신앙활동과 순교, 선교를 위한 자금지원, 서양인 신부의 파견, 배 수백척과 강한 병사 5~6만의 파병 등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내용과 임금에게 불손한 언사까지 들어 있어 ‘고금에 없던 대흉사’라 하여 당대의 조야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결국 백서는 천주교 신자들의 서양 선박 청원 사건을 확인시켜 준 셈이 되었다. 이로써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세력의 앞잡이이자 반역의 무리로 간주되었고, 이는 제사 폐지와 함께 박해의 중요한 명분이 되었다.

그 뒤 1894년 의금부의 옛 문서들을 소각할 때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제8대 조선대목구장인 뮈텔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이후 1925년 7월5일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이 로마에서 거행됐을 때 그 기념으로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였다. 현재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전시되어 있다.

황사영(알렉시오)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조카사위로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했던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식’ 대상에서는 빠졌지만 제2차 시복시성 대상자로 거론되고 있다.

황사영 백서는 오는 10월 31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 ‘서소문·동소문 별곡’ 특별전에 가면 볼 수 있다.

2014년 9월 26일 금요일

틀어진 광화문

‘이순신에서 왕실 어보까지’라는 부제의 시민청 강좌 ‘빼앗긴 문화에도 봄은 오는가’ 첫시간.


임진왜란 이후 소실된 광화문은 왕실의 존엄성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흥선대원군이 재건했다.
현재 광화문 앞 주작대로는 맞은편 남산을 향해 경복궁의 축과 15˚ 틀어져 있다.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경내에 청사를 지으면서 원래 직선으로 뻗어있던 광화문 앞길을 일부러 틀어서 건설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폭격당한 광화문은 1968년, 석축은 그대로 두고 사라진 목조 부분만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면서 위치도 원래 광화문이 서 있던 곳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으며, 각도 역시 경복궁 중심축을 기준으로 3.75˚ 틀어진 채였다. 현판도 과거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한 탓에 박정희가 쓴 한글 친필을 바탕으로 제작됐다.
광화문은 1990년부터 20개년 계획으로 시작된 경복궁 복원공사의 일부로써 2006년부터 철거되어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2010년에 1865년 고종 중건 당시의 자리에 화강석과 금강송으로 원모습을 되찾았다. 光化門이라 쓰인 현판 역시 1916년께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 중건 당시 훈련대장 겸 영건도감제조 임태영(任泰瑛)의 글씨가 드러난 유리원판이 나타나면서 원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같은 대역사 끝에 광화문을 제자리로 옮기고 나니 세종로와 틀어진 모습이 드러나 버리고 말았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조선왕조의 축과 근대라는 이름의 총독부의 축이 비틀어져 교차하는 현장이 바로 광화문이다. 혜문스님은 아무리 돈이 많이 든다 해도 틀어진 대한민국의 얼굴은 바로 잡아야 함을 강조한다.


대한민국 최고의 정치권력인 청와대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 관저로 사용되던 곳이어서인지 일본식 조경의 흔적이 남아있다. 남산의 조선총독부 정문(구 조선통감부 자리)과 청와대의 정문은 놀라울만큼 닮아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신사에서나 볼 수 있는 석등이 기둥 위에 올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석등은 사찰이나 능묘에서만 나타날 뿐, 일반적인 주거지나 궁궐에는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일본 신사 혹은 일본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일 경우로 한정된다. 현재 청와대를 제외한 다른 공공기관에서 이런 형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일본식 석등을 청와대에 설치한 것일까?
청와대 정문에 설치된 일본 야스쿠니 신사 석등과 동일 모형의 석등을 철거해 달라는 시민단체의 요구는 법원에 의해 기각되었다. 청와대나 사법부의 역사의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은 건설 당시 중앙청역이라는 이름으로 서울시 지하철건설본부 주관하에 김수근 교수 등의 디자인 자문을 거쳐 삼성종합건설(주)가 1985년에 시공하였다. 문제는 부처님을 모신 법당 앞에 1기만이 설치되는 한국식이 아니라, 다수의 석등이 1열로 배치되는 일본 신사의 전통을 따랐다는 것이다. 또한 숭유억불 정책을 폈던 조선의 법궁 경복궁 앞에 불교식 석등을 세우고, 그것도 일본 신사의 진입로(도쿄 도쇼궁)처럼 배치한 것은 분명 넌센스다. 서울메트로는 ‘문화재제자리찾기’의 지적을 수용하여 2012년 경복궁역 5번 출구의 석등 조형물 6개를 철거하였다.


국보 20호 다보탑의 기단 네 모서리에 배치됐던 돌사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4개 중 3개를 약탈하던 과정이나 해방 이후 다보탑 보수 중에 나머지 1개가 기단 중앙부로 옮겨지거나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10원짜리 동전에 부조된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다. 수십년간 엉뚱한 자리에 있던 돌사자가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스님의 요청으로 원위치로 이동됐다.
1개의 돌사자가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얼굴에 난 상처 덕분이다. 없어진 돌사자 3개 중 1개는 영국으로 팔려갔고, 2개는 일본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환수하지 못하고 있다. 돌사자가 가운데 쪽에 있는 10원짜리 주화는 조금씩 새로 찍으면서 시간을 두고 교체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후쿠오카 쿠시다 신사가 보관하고 있는 힌젠도(肥前刀). 1895년 10월 8일, 일본 공사 미우라의 주도하에 저질러진 명성황후 살해사건 당시 일본인 자객 토오 가쯔아키가 명성황후를 절명시킨 칼이다. 전체 120㎝(칼날 부분 90㎝) 길이이며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적혀 있다. 국모를 살해한 뒤 국부검사를 자행(에이조 보고서)하고 장례식의 기록마저 약탈해 간 일제의 만행을 확인한 후 혜문스님은 빼앗긴 문화재를 찾아오는 일에 더 큰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음악 교과서에 민물에도 살고 바다에도 사는 숭어(Gray Mullet)로 잘못 번역돼 알려진 슈베르트의 송어(trout) 얘기 등은 무척 재미있고 교훈적이었다. 혜문스님 표현처럼 배트맨과 베토벤은 같을 수 없다. 틀어진 역사를 바로 맞추고 빼앗긴 문화재를 되찾는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일이다. 남은 회차도 기대가 된다.

2014년 9월 24일 수요일

선잠단지(先蠶壇址)

Site of Seonjamdan (Altar)


사적 제83호 선잠단지는 누에를 처음 치기 시작했다는 잠신(蠶神) 서릉씨(西陵氏)에게 제사 지내며 누에농사의 풍년을 빌던 곳이다. 조선시대에 임금은 친경(親耕)이라 해서 손수 농사짓는 시범을 보이고, 왕비는 친잠(親蠶)이라 하여 누에 치는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의식(衣食)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선잠단은 조선 초기부터 운영되었으나, 이 단은 1473년(성종4)에 마련한 것이다. 단의 크기는 한 변이 2장 2촌이고, 높이는 2장 7촌인데 세종 때 정한 단의 규모와는 조금 다르다. 선잠단 제사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가운데 보통 제사(中祀)에 속하며, 매년 음력 3월의 길한 사일(巳日, 뱀날)에 제사를 지냈다. 1908년(융희2) 제사 제도를 개정할 때 선잠단 신위를 선농단과 함께 사직단에서 배향하게 하고 제단의 터는 국가 소유로 했다.


2014년 9월 23일 화요일

381호 전차와 지각생

일본차량제조주식회사(일본 나고야)에서 제작된 길이 13.7m, 너비 2.4m, 높이 3.2m, 무게 약 18t의 전차 381호(電車 381號, Streetcar No. 381)는 1930년경부터 1968년 11월 29일까지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하였다. 서울에서 전차운행이 처음 시작된 날은 대한제국 광무 3년인 1899년 5월 17일이었으며, 운행구간은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였다.
이후 전차노선은 신설되고 연장되면서 급속하게 늘어났다. 전차는 1960년대 초반까지 서울시민의 대표적인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이후 버스, 자동차 등 대체교통수단의 발달로 경쟁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버스와 자동차 운행에 오히려 방해가 되자 서울시에서는 1968년 11월 29일 서울 시내에서 전차운행을 일제히 중단하였다. 381호 전차는 현재 국립서울과학관에 전시 중인 363호와 함께 서울에 마지막 남은 2대의 전차 가운데 하나다. 광진구 능동 어린이대공원에 보관하고 있던 것을 2008년 1월에 서울역사박물관으로 옮겨온 후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복원처리 과정을 거쳐서 전시하고 있다.



사진은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끌려갔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평화의 소녀상’으로 유명한 김운성·김서경 조각가 부부의 ‘전차와 지각생’(2010) 작품이다.

2014년 9월 22일 월요일

어르신 원예·미술치료 작품

지난 3월과 4월에 걸쳐 도봉구에 있는 노인요양공동생활가정에서 사회복지 현장실습을 마쳤다. 굿모닝요양원에서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원예치료와 미술치료를 병행하여 치매 어르신들의 인지기능 보존과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고, 거의 모든 프로그램에 원장님은 물론 요양보호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실습생이 함께 하며 노인장기요양 1~3등급의 노인성 질환을 앓는 65세 이상의 어르신 아홉분을 돌보았다.
사진 정리를 하던 차에 당시의 작업 결과물 몇가지를 옮겨 본다.


▲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뭇잎과 나뭇가지를 풀을 사용하여 하얀 전지에 붙이고, 색색의 물감을 풀어 붓으로 칠하여 완성한 어르신들의 ‘봄 정원’ 합작품. 그림물감은 어르신들이 편안하고 쉽게 드로잉 할 수 있어 비교적 낮게 통제되는 드로잉 재료이다.


▲ 스펀지를 하얀색 페인트에 적시고 미리 잘라 놓은 페트병 하단 표면에 칠한 다음, 다양한 문양의 꽃과 나비, 열매 도안을 부착하여 화분을 완성함. 이후 큰 화분에서 스파트 필름(spot film)을 옮겨 심고, 하나씩 어르신들 침상에 가져다 놓았는데, 어르신들의 얼굴에도 밝은 웃음이 도는 듯한 느낌이었다.


▲ 준비된 도안에 수수깡을 붙이는 작업을 통해 손목운동과 힘의 조절을 함양케 하는 실습생의 집단프로그램.


▲ 16절지를 8등분하여 연한색(분홍·하늘색…)으로 밑색을 칠하고, 진한색(검정·남색…)으로 덧칠한 후 나무젓가락 끝 모서리를 이용하여 긁어내어 드로잉하는 작업으로 완성한 밤벚꽃놀이 작품. 벚꽃이 만개한 봄 계절과 부합하는 좋은 아이템이었다.


▲ B5 용지에 인쇄된 어르신 각자의 띠동물을 확인하고 스티커를 붙이는 작업으로 진행된 ‘나의 띠동물 알아보기’ 프로그램.


▲ 천연재료를 이용하여 황색(단호박)·녹색(치자물)·적색(딸기)의 꽃 색깔로 고명떡을 주물러 만들고 장미꽃과 이파리, 넝쿨을 구현하여 미리 준비한 하얀 백설기에 올려놓아 완성하는 떡케잌 만들기 아이템이 참으로 참신했다.


▲ 검정 도화지에 부드럽고 그리기가 용이한 파스텔로 자유롭게 드로잉하고, 그 위에 금가루·은가루를 뿌린 어르신들의 작품. 어머니라는 말을 하기 전에 어머니 심상이 먼저 떠오르는 것처럼, 심상의 표현이라는 직접적인 표출이 미술치료의 장점인 듯.



▲ 옛 선비들의 사군자 그림처럼 묽게 푼 물감으로 한지에 난초와 벚꽃으로 멋을 내는 화선지 수묵화 프로그램. 한지는 먹이나 물감과의 친화성으로 인한 발색효과, 수분의 흡수성과 번짐의 효과를 지닌 독특한 표현효과를 보여주었다. 미리 화지에 대해 공부를 해두고 그때그때 적당한 화지를 선정하고 그에 부합하는 드로잉 도구를 맞춰주는 것도 미술치료사의 중요한 몫인 듯하다.


▲ 과일·채소 도안 용지에 색종이를 찢어 풀로 붙인 어르신들의 작품.


노령인구가 급증함에 따라 노인성 치매 환자의 수도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치매는 이제 더 이상 개인이나 가족들만의 고통일 수 없다는 사회적 역할론이 강조되고 있다.
같은 중증 노인성 질환이 있더라도 ‘품위 있는’ 노후를 보낼 수 있는 환경이야말로 품격 있고 가족 같은 사회공동체의 필요충분조건이다.
노인장기요양 등급에 들지 않는 조기 경증 치매 어르신들을 돌볼 ‘등급 외 케어센터’도 늘어나야 악화를 막고 예방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9월 21일 일요일

서궐 경희궁

경희궁지(慶熙宮地 : 사적 제271호)는 조선시대의 5대 궁궐로 꼽히는 경희궁(慶熙宮) 터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되어 조선 후기 동안 중요한 궁궐로 자리매김 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지만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 창덕궁과 창경궁을 합쳐 동궐이라 부르는데 이 말과 짝을 이루어 경희궁을 서궐(西闕)이라고도 하였다.
원래 경희궁에는 정전인 숭정전과 편전인 자정전 외에도, 임금의 침전으로 용복전과 회상전이라는 2개의 침전이 있었으며, 흥정당과 장락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각들이 지형에 맞게 어우러져 있었다. 궁에는 정문인 흥화문이 있고 동쪽에는 흥원문, 서쪽에는 숭의문, 남쪽에는 개양문, 북쪽에는 무덕문이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소유가 넘어가면서 전각들이 철거하여 이전되었고 궁역이 축소되어 궁궐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잃었다. 지금의 경희궁은 몇몇 전각들이 복원되었지만 대부분의 전각들이 사라지고 궁궐터도 많이 축소되어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광해군은 왕기(王氣)가 서렸다는 인왕산 자락에 경덕궁을 세웠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겪은 후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리한 공사였다. 광해군은 공사 중지를 주장하는 신하들을 설득하기 위해 정문을 단층으로 세웠다. 경희궁 복원사업을 시작하면서 1988년 이곳으로 옮겼지만, 이곳이 원래의 자리는 아니다.
수천 칸에 달했던 경희궁의 전각 구성은 1820년대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는 서궐도안(西闕圖案  : 보물 제1534호)을 통해 그 윤곽을 살필 수 있다.


1918년(광해군 10)경에 건립된 숭정전(崇政殿)은 경희궁의 정전(正殿)으로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하거나 궁중연회, 사신 접대 등 국가적인 공식의례가 행해진 곳으로 경희궁의 으뜸가는 건물이다.
특히 경종·정조·헌종 등 세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러나 일제가 경희궁을 훼손하면서 이곳에 있던 숭정전 건물을 1926년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曹溪寺)에 팔았다. 원래의 숭정전은 법당건물로 개조되어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正覺院)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의 숭정전은 발굴과 문헌조사를 통하여 복원된 건물이다.


자정전(資政殿)은 경희궁 숭정전 뒤쪽에 있는 편전(便殿)으로서 1617~20년(광해군 9~12)에 건립되었다. 편전이란 국왕이 신하들과 정사를 의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경희궁에서는 자정전 이외에 흥정당(興政堂)도 정사를 논하거나 경연을 여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자정전은 편전으로 지어졌지만 숙종이 승하하였을 때는 빈전(殯殿)으로 사용되었으며, 선왕들의 어진(御眞)이나 위패가 임시로 보관되기도 하였다. 자정전은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지만 서울시의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발굴을 통해 확인된 위치에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서암(瑞巖: 상서로운 바위)은 윈래 왕암(王巖: 임금님 바위)으로 불렸는데 그 이름으로 인해 광해군이 이곳에 경희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숙종 때에 이름을 고치고, 숙종이 직접 사방석(四方石)에 서암 두 글자를 크게 써서 새겨 두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태령전(泰寧殿)은 영조의 어진을 모셔두던 건물이다. 이 건물은 본래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영조의 어진이 그려지자 1744년(영조 20)에 이곳을 다시 수리하여 어진을 모셨다. 선원전(璿源殿)의 경우 선대 국왕들의 어진을 모셨던 것에 비해서 태령전은 영조 재위 당시에 현왕인 영조 자신의 어진을 모셨다는 점이 특징이다.
태령전은 일제에 의해 흔적도 없이 파괴되었지만 서울시는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서궐도안에 따라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고 현판은 석봉 한호의 글씨를 집하하여 만들었다.


드므는 방화수(防火水)를 담는 용기로써 화마(火魔)가 불에 비친 제 모습에 놀라 도망가게 함으로써 화재예방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고 한다.


경희궁 장식기와(decorative tiles)
조선시대에는 주요 건물의 지붕 추녀마루 위에 용두(龍頭)와 여러가지 동물 모양을 한 잡상(雜像)을 올려놓았다. 이는 화재를 막고 잡귀로부터 건물을 보호한다는 주술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아무 건물이나 쓸 수 없었으며, 잡상의 숫자가 많을수록 건물의 등급이 높았다.


2014년 9월 20일 토요일

백제 금동대향로, 칠지도, 사택지적비

국보 제287호 백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盧)는 7세기 때의 백제향로이다.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되었다. 높이는 61.8㎝, 무게는 11.8㎏이고 몸체와 뚜껑으로 구분되며 위에 부착한 봉황과 받침대를 포함하면 4부분으로 구성된다.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첩첩산중으로 이루는 풍경이 새겨졌다. 여기에 16인의 인물상, 39마리의 동물상이 표현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나무·바위·산길·시냇물·폭포·호수 등이 있다. 뚜껑 꼭대기에는 여의주를 품고 날개를 편 채 서있는 봉황이 따로 붙어 있다. 봉황 앞가슴과 악사상 앞뒤에는 5개의 구멍이 뚫려 있어 몸체의 향 연기가 피어오를 수 있게 하였다.
몸체는 활짝 핀 연꽃모양이며, 연잎의 표면에 불사조·물고기·사슴·학 등 26마리의 동물이 배치되어 있다. 받침대는 연꽃 밑부분을 입으로 물고 고개를 쳐들고 떠받치고 있는 한 마리의 용으로 표현되었다.
이 향로는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로의 영향을 받은 듯하나, 중국과 달리 산들이 입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인다. 백제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 등에 대한 이해를 돕는 귀중한 작품이다.


칠지도(七支刀)는 백제 왕세자가 왜왕에게 보낸 길이 74.9㎝의 철제 칼로,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에 있는 이소노가미 신궁(石上神宮)에 봉안되어 있다.
앞면 “태△ 4년 5월 16일 병오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줄 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지금까지 이러한 칼은 없었는데 백제왕세자 기(奇)가 성스러운 말씀을 내었으므로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이라.”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백제 의자왕 때의 대신 사택지적(砂宅智積)이 남긴 높이 109㎝,  너비 38㎝, 두께 29㎝의 비석이다. 1948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글씨를 새긴 부분은 한 변 7.6㎝의 정방형으로 구획하여 그 안에 약 4.5㎝ 크기의 글자를 한자씩 음각하였다. 비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동그라미 안에 봉황을 새겨 붉은 칠을 한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비분의 내용은 갑인년(654, 의자왕 14)에 내기성(奈祇城)의 사택지적이 늙어가는 것을 탄식하여 불교에 귀의하고 원찰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사택지적은 백제 후기 대성8족(大姓八族)의 하나인 사택씨 출신으로 의자왕 2년(642)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백제로 돌아왔다. 대좌평의 직위까지 올랐으나 의자왕 14년(654) 관직에서 물러났다.
비문의 문장은 중국 육조시대에 유행한 사륙병려체(四六騈儢體)로 유려하며 글자체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로서 당시 백제의 문화수준을 알 수 있다. 이 비는 백제의 최고급 귀족이 남긴 중요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제 제1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 교토 고류지(廣隆寺 광륭사)의 목조미륵반가사유상(木造彌勒半跏思惟像)은 일본의 국보로 전체 높이 123.5㎝, 보살상 앉은 키 83.3㎝이다. 백제로부터 건너갔거나 백제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쌍둥이처럼 닮았다.
보살상은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다리를 얹어 반가좌를 틀고 오른쪽 손끝은 오른뺨 위에 댄 사유의 자세를 하고 있다. 반가사유상은 석가모니가 왕자였던 시절에 상념에 빠져있던 모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미륵보살은 56억 7천만년 뒤에 이 세상에 나타나 중생을 제도해 줄 부처이다. 도솔천(兒率天) 용화수(龍華樹: 꽃가지가 용의 머리 같아 붙여진 이름)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기다리는 미륵보살은 출가 이전에 고뇌하던 왕자의 모습과 닮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륵보살은 종종 반가사유상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주변 여러 나라 가운데 왜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이루었으며, 멸망한 뒤에도 백제유민 일부가 일본열도로 망명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불교를 비롯해 백제의 다양한 문물이 왜로 전해져 일본 곳곳에는 백제 관련 유적과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백제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일본에 가서 배를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백제의 배는 백제방(百濟舫) 또는 백제선(百濟船)으로도 불렸다. 배의 바닥은 편평하고 돛은 1개인 것이 특징인데, 돛이 2개라는 설도 있다(사진: 쌍범 당도리선, 단범 당도리선)
복원된 백제선은 길이 12.6m로 4~5세기 중국과 일본을 오가던 사신선이다. 고대선박 전문가가 총동원되어 복원한 작품으로 바로 한강에 띄워도 될 만큼 견고하다. 한성백제박물관의 외관은 백제의 배를 형상화하여 건축되었다.


2014년 9월 19일 금요일

굶어 죽는다는 게 정말인가요?

제57차 평생교육사 목요회…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정귀옥 선생님이 북한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탈북 과정에서의 가슴 졸였던 위기의 순간, 남한 사회에서의 좌충우돌 정착과정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전해주심.


정선생님이 장마당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화면도 보였다. 굶어죽은 원귀(寃鬼)를 아귀(餓鬼)라고 하던가.
현재 북한의 식량난은 상당히 심각하여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렀던 시기에 육박하는 상황이라고 한다. FAO(유엔 식량농업기구)와 WFP(세계식량계획) 등이 세계 식량사정을 평가한 보고서에 따르면 20년 전과 비교하여 굶주리는 인구가 2억명가량이 줄었지만, 북한의 기아 인구는 오히려 2배로 늘었다.


현재 3만명에 가까운 탈북자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북한이탈주민들이 새터인 우리 사회에 잘 정착하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 것이다.


2014년 9월 18일 목요일

백제의 복식과 기와

중국 역사서인 「남사」와 「북사」에 ‘백제의 옷은 고구려와 비슷하다’란 기록이 있다.
백제의 옷은 고구려와 비슷하여 남자는 저고리와 바지를,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 두루마기를 입었다. 저고리는 엉덩이를 덮는 길이에 허리띠를 둘러 여미고, 깃·섶·끝동 등에는 선이 있었다. 두루마기는 소매가 넓으며, 중국식 두루마기도 입었다.
백제 왕은 자주색의 소매가 넓은 두루마기에 흰색의 가죽띠를 두르고, 푸른색의 비단바지를 입었다. 금꽃으로 장식한 검은색 비단관을 쓰고,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옷의 색과 재질이 달랐다.


「직공도」는 중국에 조공하러 온 외국 사신의 형상·복식·풍속 등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 전해지는 직공도 중 가장 오랜된 「양직공도」(梁職貢圖 25×198㎝)는 6세기 중국 양(梁)나라를 찾은 백제·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의 역사와 풍속을 기록한 화첩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림은 양나라 원제(재위 552~554) 소역이 왕자시절인 539년에 제작한 원본을 1077년 북송시대에 모사한 것이다.
원본에는 25개국의 사신이 그려져 있으나 지금은 12개국 사신 모습만 남아 있다.
‘백제국사(百濟國使)’로 기재된 그림 속 백제사신의 모습은 가늘고 길게 째진 눈매에 낮고 넓은 콧망울, 붉고 단아한 작은 입술, 오동통한 볼이 특징이다. 머리에 흰색 관을 쓰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사신 그림 옆에는 백제의 유래와 도성·제도·풍속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어 6세기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현존하는 회화자료 가운데 백제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이 가장 잘 남아있는 자료이다.


국립고궁박물원 소장된 「당염립본왕회도」(중국 당 7세기)도 양직공도의 모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오른쪽부터 당태종, 예예국, 파사국(이란), 백제국, 호밀단(아프가니스탄), 백제국(白題國), 말국(위구르), 중천국(인도), 사자국(스리랑카), 북천축, 양반타, 무흥국, 국자국, 왜국(일본), 고려,국 자알국, 신라국, 탕창국, 낭아국(말레이시아), 등지국, 주고가(우즈베키스탄), 아발국(카자흐스탄), 건평연(태국), 여단국 사신 순이다.


도다이지 쇼소인(東大寺 正倉院)에는 백제에서 일본 천황에게 선물했다고 전하는 바둑판(목화자단기국)이 소장되어 있다. 이 바둑판은 하나의 예술품이라는 찬사를 받아왔는데 자줏빛의 자단목에 선과 문양을 상아와 각종 안료로 화려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바둑판의 선은 19선이며 화정이 17개인데, 이는 한국의 순장(順丈)바둑에서 볼 수 있는 것이라 흥미롭다.
바둑판을 담는 함(금은귀갑기국감)은 바둑판보다 조금 크다. 역시 쇼소인에 소장되어 있으며, 바둑판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다. 바깥면에 거북무늬를 연속적으로 배열하고 그 무늬 안에 금박과 은박ㄷ을 하고 다시 검은 선으로 당화문(唐花文)을 그려 넣은 뒤에 투명한 각질의 판자를 끼워 놓았다.
바둑돌은 화려한 바둑판과 함께 걸맞도록 상아의 표면을 염색하여 문양을 새기고 채색하였다. 양면에 화식조(花植鳥) 무늬를 새겼으며 붉은색과 감색의 상아에 각각 다른 새 모양을 새겨넣었다. 이 붉은색과 감색 바둑알은 한 벌로 보인다. 흰 바둑돌인 백기자는 석영, 검은 바둑돌인 흑기자는 사문암으로 만들었는데 양면의 꼭대가가 평평하게 되어 있다.
바둑돌을 담아 두었던 용기(은평탈합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뚜껑 윗면에 꽃나무 아래에서 꽃가지를 물고있는 꼬리 긴 새를 장식하고 옆면에는 염주무늬와 4장의 꽃잎무늬를 늘어놓았다. 또하나는 뚜껑 윗면의 은판 무늬에서 중앙에 코끼리를 장식하고 아래쪽 암석에 꽃가지가 둥글게 자란 모양을 표현하였다.


백제의 생활 유적에는 기와가 많이 출토된다. 기와는 집의 지붕을 덮는 건축자재로, 직접 지붕을 덮는 암키와, 암키와를 서로 연결해주는 수키와, 처마 장식으로도 쓰이는 막새 등 종류와 모양이 다양하다.
백제 사람들은 4세기 무렵 주로 궁궐·관청·사원 등의 큰건물에 기와를 사용하였다. 서울에서 한성기 기와가 출토된 유적은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 등이다. 백제기와는 대체로 회색을 띠며 두께는 1㎝ 안팎으로 얇다. 제작방법과 관련해서는 점토 띠를 쌓아 만든 것과 와통을 이용한 것으로 나뉜다. 이밖에 풍납토성 안에서는 기둥장식, 토관,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 모두 고급건문과 주요 국가시설에 쓰인 것이며 백제 도성으로서 풍납토성의 위상을 보여준다.
수막새(Roof-end Tile)는 기와지붕의 처마 끝에 거는 기와로서 수키와에 드림새를 붙여 마감을 깔끔하게 만든 기와이다. 백제사람들은 수막새에 짐승·엽전·꽃 등의 문양을 많이 장식해 복을 기원하였다.



올릭픽공원 내에 설치된 「기와를 입은 대지」에 대한 조각가 이승택의 변…
“흑(黑)기와는 동양의 아름다운 유산이다. 서양이 동경하는 기와의 신비는 오랜 우리 역사 속에 숨 쉬고 있다. 지붕 위에서만 있던 기와가 땅으로 내려와 광활한 대지와 자연의 품 안에서 인간을 감싸고 있다.”